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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펌글 등등등)

온가족이 세계여행 - 정미자 이정현부부의 행복

ㆍ“다음 계획이요? 저희, 별 계획 없는 거 아시면서(웃음).
ㆍ일단 시작했으니 한 바퀴는 돌아야죠”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 전 세계를 여행하는 꿈을 꾸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갑갑한 일상의 이곳을 벗어나 자유와 새로움이 가득한 세계 곳곳을 둘러보는 상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다. 이 짜릿한 상상을 현실로 옮긴 가족이 있다. 1년여 간 이어진 여행은 현재 아르헨티나에서 ‘잠시’ 멈췄다. 하지만 끝은 아니다. 길 위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과 사람들, 그리고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해 셋에서 넷으로 함께하게 된 이 가족은 오늘도 여전히 출발선에 서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일상을 뒤로하고 어딘가로 떠나는 것은 엄청난 용기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많은 이들이 한 번쯤은 집을 나설 생각을 해보다가도 결국에는 회사 때문에, 가족 때문에, 아이 교육 때문에 주저앉아버린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런 면에서 이 사람들은 정말 자신들의 표현대로 ‘미친 가족’이라 부를 만하다. 잘 다니던, 그것도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직장을 그만두고 거의 ‘무계획’이나 다름없는 일정을 세워 세계 일주를 떠나버린 이 가족 말이다.

정미자(36)·이정현(34) 부부는 2007년 5월, 당시 생후 43개월 된 아들 한규까지 데리고 2년 예정의 세계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민박집 ‘남미사랑’을 운영하며 아르헨티나를 찾는 여행객들에게 편안히 쉴 곳을 제공해주고 있다.

가족만의 온전한 시간을 꿈꾸며 시작한 세계 여행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아무리 간절한 목표가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훌륭한 계획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상대가 함께 해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부부의 출발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반박했다면 아마도 이들은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점이 너무 많지만 ‘여행을 미치도록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가진 이 부부는 2001년 가을 이탈리아 로마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이정현씨는 군생활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사회에 뛰어들기 전 세상 구경을 하겠다는 생각에 생애 첫 배낭여행을 하고 있던 중이었고, 정미자씨는 회사에서 진행하던 큰 프로젝트를 마치고 2주 간의 휴가를 받아 평소 가보고 싶었던 이탈리아를 찾아 달콤한 휴식을 즐기던 중이었다.

“로마의 한 민박집에 묵게 됐는데 당시에 저는 ‘여행 중 대도시에서는 그 도시만의 밤 문화를 즐겨보자’는 주의였거든요. 그래서 그 민박집에 묵고 있는 여행자들을 꼬드겨 라이브 카페를 찾아 나섰죠. 그때 아내를 처음 봤는데 겉모습은 얌전하고 차분해 보이는데 재미있게 잘 어울려 노는 모습이 좋더라고요. ‘참 좋은 사람이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인연이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일까, 상황이 잘 맞아떨어졌다. 다음날 귀국이 예정되어 있던 정미자씨가 사진 필름을 맡겨뒀던 현상소가 일찍 문을 닫았다며 곤란해하자 이정현씨가 대신 사진을 찾아서 한국에서 전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게 됐다. 그리고 한 달 반 후, 사진을 매개로 두 사람은 서울에서 재회했고 자연스레 연인으로 발전, 2년 후 부부의 연을 맺었다.

“사실 아내도 로마에서부터 저한테 마음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특별한 말없이 결혼까지 쭉 연결됐어요. 그러는 바람에 제가 프러포즈를 못했는데 그게 아내를 만나서 이제껏 저지른 가장 큰 실수였어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런 장면이 나오면 아직도 아내가 저를 노려보죠(웃음).”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이 부부에게도 일상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정현씨는 매일 아침 족쇄처럼 목을 조여 오는 넥타이를 매고 헐레벌떡 회사로 향했고, 미자씨 또한 한규를 낳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 업무에 매달려야 했다. 많지는 않아도 그런 대로 살 만큼의 수입이 있었고, 특별한 문제없이 평탄한 하루하루가 이어졌지만 조금씩 온몸이 근질거려왔다.

“둘 다 너무 지치고 소진되어 있다는 생각에 잠시나마 좀 떠나 있고 싶어서 2006년 여름 그리스와 로마로 여행을 갔어요. 붕붕 떠 있는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떠났던 건데 그 여행이 오히려 ‘불’을 댕긴 거예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결혼할 때 ‘너무 늙어 힘 빠지기 전에 세계 일주를 하자’고 약속했던 것을 떠올리며 ‘무조건 가자!’를 외쳤죠.”
야마를 끌고 다니며 어린아이를 태워주는 인디오들(위). 미국 위스콘신, 선배의 별장에서(아래).

그해 겨울이 시작될 무렵, 미자씨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여행 준비에 착수했다. 이듬해 봄에는 정현씨 또한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기쁜 마음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금쪽’같은 손자까지 데리고 여행을 간다는 두 사람을 말리던 양가 부모님을 설득하고 살던 집을 정리했다. 워낙 준비성 없는 두 사람인지라 떠나기 전 준비 과정이 여행을 통틀어 가장 힘든 시기였단다.

“주변에서는 대부분 부러워하더군요. 간혹 ‘생각이 있냐 없냐’, ‘아이 장래는 어쩔 거냐’며 말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희 부부가 별로 다른 사람들의 말에 신경 쓰는 편이 아니라 그냥 그런가 보다 했어요. 다만 저희도 어린아이를 긴 여행에 데리고 가도 될지 조심스럽긴 했죠. 하지만 한규와 오랫동안 떨어져 있을 수는 없겠더라고요. 한규한테도 장난감이나 유치원이나 공부보다 엄마 아빠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부부의 여행에 대한 생각은 간단했다. 여행은 2년으로 하되 돈이 떨어지거나 셋 중 누군가가 심하게 아픈 경우가 발생하면 미련 없이 돌아온다는 것. 그 외에는 아무것도 원칙으로 삼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한국을 떠났다.

발길 닿는 곳마다 가득했던 고마운 사람, 값진 추억
여행은 미국 LA를 시작으로 북미-중미-남미를 거쳐 아프리카로 넘어간 뒤 다시 유럽-중동-인도-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대륙 내에서의 경로나 어느 나라를 갈지는 그때그때 상황과 형편에 맡기기로 했다.

가족들의 둘째 아들로 불렸던 ‘달구지’
“사람마다 여행하는 스타일이 다르지만 저희 부부는 워낙 대책 없는 성격이라 많은 것이 즉흥적으로 이뤄졌어요. 여행을 결정하고 나서도 루트는커녕 첫 번째로 갈 대륙도 정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제가 알던 브라질 친구들이 상하이에 출장을 간다기에 그곳에서 만난 적이 있었어요. 그 친구들한테 세계 일주를 할 거라고 했더니 ‘당연히 리우 카니발을 보러 와야 한다’고 하더군요.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더니 ‘그럼 아메리카 대륙부터 가야겠네’라면서 시작된 거예요. 만약 그때 첫 여행지가 아시아였다면 지금쯤 ‘인도사랑’이란 민박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죠(웃음).”

온갖 특이하고 낯선 사람들을 다 만났던 미국, 자연 경관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캐나다, 부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제국의 나라 멕시코, 곳곳이 전부 시간의 흔적인 과테말라, 아름답지만 위험한 나라 베네수엘라, 한규가 하늘로 날아올랐던 콜롬비아, 따뜻한 사람들과 소중한 추억을 만들었던 에콰도르, 우연과 인연이 반복된 페루·칠레·파라과이, 화려한 ‘리우 카니발’의 나라 브라질, 그리고 잠시 짐을 내려놓고 여행의 2막을 시작한 아르헨티나까지.

여행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스펙터클했으며 뿌듯하기까지 했다. 지나치게 낙천적인 서로의 성격 탓에 우여곡절 해프닝을 겪기도 하고 황당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그 또한 즐겁고 고마운 추억으로 차곡차곡 쌓여나갔다.

‘여행은 곧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정현씨에게 여행 중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은 한 명 한 명 고맙고도 귀한 인연이었다. 특히 아르헨티나 남부 칼라파테에서 만났던 후지여관 ‘사모님’은 가장 기억에 남는 멋진 분이다. 세상 끝 척박한 땅에서 일본인 남편과 한 쌍의 학처럼 친절하고 검소하게 삶을 꾸려가는 것을 보며 부부는 ‘그들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직도 연락을 이어가고 있을 만큼 배울 점이 많은 분들이다.

“아내도 저도 매 순간마다 떠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할 만큼 좋은 여행이었어요. ‘왜 좀 더 일찍 떠나지 못했을까’ 후회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한국이 그리울 때도 많았죠. 어떨 때는 퇴근 후 회사 동기나 친구들과 함께했던 소주 한 잔과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얼큰한 김치찌개가 눈앞에 아른거리더군요. 무엇보다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무척 그립죠. 많이 보고 싶고요.”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해변(위). 친구들과 함께 있는 한규의 최근 모습(아래).

약간의 우려를 했던 것과는 달리 한규는 부부보다 더 빨리 낯선 생활에 적응하고 또 스스로 즐기며 행복해했다. 게다가 한국에서 살았을 때에 비해 놀랄 만큼 건강한 아이가 되었다. 어디서나 잘 먹는 강한 생활력 덕분인지 병치레도 하지 않고 쑥쑥 커서 지금은 반에서도 제일 크고 튼튼한 아이로 통한다(한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현지 초등학교를 다니는데 반 아이들 대부분이 백인이라 다들 체격이 큰 편이다).

“간혹 ‘아이 교육 때문에 외국에 나왔죠?’라는 질문을 받는데, 저희는 한규가 영어나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고, 여행 중에 본 자유의 여신상이며 유적지들을 기억하지 못할까봐 걱정하지도 않아요. 지금은 한규가 저절로 스페인어를 익히고 있지만 여길 떠나서 살다 보면 다 잊어버릴지도 모르죠. 또 어쩌면 한규는 한국에서 영어학원을 다닌 아이들보다 더 영어를 못하고 게다가 한글까지 제대로 못 깨우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 가족이 24시간 부대끼며 나눈 추억과 사랑만큼은 한규 마음에 영원히 남지 않을까요?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한규는 여행에 대한 전체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보다 특정한 사건들을 기억해 요즘도 가끔씩 이야기를 하는 편이다.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혼자서 씩씩하게 패러글라이딩을 탔던 일, 버기카를 타고 샌드보딩을 갔던 날, 베네수엘라 엔젤폭포에서 잡았던 커다란 벌레 같은 것들이 한규에게 인상 깊게 남아 있는 특별한 추억들이다.

앞으로도 어디로든 행복을 찾아갈 계획
2년의 세계 일주를 목표로 시작한 여행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으로 바뀐 것은 한규 때문이다. 아이의 발달 시기상 지금은 한규에게 친구가 필요한 때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그렇다면 여행을 1년 정도 쉬면서 경비도 좀 더 마련해보기로 결심했다.
콜롬비아에서 한규는 혼자 패러글라이딩을 타고 용감히 하늘을 날았다.

“썩 힘든 결정은 아니었어요. 1년 정착하는 비용이 여행하는 비용보다 훨씬 적게 드니까 문제도 없고요. 그 결심을 했을 때 우리 가족이 아르헨티나에 있었기 때문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집을 알아보게 된 거예요. 참 단순하죠?(웃음)”

그리고 시작된 여행의 2막. 부부는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아르헨티나를 찾는 여행자들을 맞이하며 살아가고 있고, 한규는 올해 학교에 입학해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엄두도 못 냈지만 내심 너무도 바랐던 ‘두 번째 보석’을 얻게 됐다. 지난해 4월 2일 태어난 은규는 부부에게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사랑스러운 존재. 백일 때 벌써 10kg이 넘은 우량아 은규는 요즘 아장아장 걸음마를 연습 중이다. 아빠 손가락도 잘 깨물고, 리모컨도 잘 던져 부수고, 안아주는 사람 얼굴도 잘 때리는, 그런 아이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가장 최근의 가족 사진. 정미자씨와 한규, 은규(왼쪽). 아르헨티나 칼라파테에서 송어를 낚은 이정현씨(오른쪽).

“보물이 하나 더 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이 녀석은 또 언제 키워 같이 여행 가나 하는 생각도 하고요. 이곳에서 저희 가족은 여전히 느슨하고 여유롭게 살고 있어요. 물론 초반에는 문화 차이로 인한 어려움이 없진 않았죠. 여행자로 여길 왔을 때는 예쁜 건물, 멋진 탱고 쇼만 눈에 들어왔는데 발을 딛고 살아간다는 것은 또 다르더라고요. 그런데 1년 정도살다 보니 이제는 저희와도 잘 맞는 것 같고 한국식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미련한 짓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최대한 현지인들처럼 생각하면서 편한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부부를 아는 사람들은 이제 가족의 다음 계획을 궁금해한다.
“저희, 별 계획 없는 거 아시면서(웃음). 일단 처음 마음먹었던 한 바퀴는 마저 돌아야죠. 개인적으로는 남미를 떠나기 전 말을 타고 파타고니아 지방을 돌아보고 싶고, 장기적으로는 요트를 사서 세계 일주를 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어요. 자격증도 따야 하고 돈도 모아야 하겠지만 꿈을 계속 꾸다 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지겠죠. 확실한 건 앞으로도 계속 행복을 찾아갈 계획이라는 거예요.”

부부는 여러 번 자신들의 삶이 정답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떠나고 싶어한다고 해서 자신들처럼 훌훌 떠날 것을 부추길 생각도 없다. 어느 누구도 삶에 있어 정답을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선택 역시 ‘정답’은 아닐지라도 그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뿐이라고.

용감하게 나선 길 위에서 가족은 버린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 그리고 저마다 한 뼘씩 자라고 넓어졌다. 이 여행의 끝은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때 또 한 번 이 가족을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글 / 이연우 기자 ■ 사진 제공 /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