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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펌글 등등등)

[스크랩]< My new life >커피 한잔에 빠져 1억 연봉 버리고…

“소박하게 마음의 즐거움을 가지고 살 수 있으면 그게 대박이지요.”

지난 5일 제주공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제주 서남부 모슬포항으로 이어지는 간선도로를 따라가길 50분 정도. 눈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는 서귀포시 안덕면의 부둣가 횟집거리가 끝날 즈음 서구식 통나무집 모양의 커피전문점이 이방인처럼 서 있었다. 최남단커피볶는집 ‘Stay with coffee’.

사장인 박상국(45) 씨는 전문 바리스타로 활동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는 업계의 ‘신인’이었다. 희끗한 머리와 파마약으로 살짝 탈색된 갈색 머리를 한가닥으로 묶어내린 꽁지머리, 오른쪽 귀에는 블루투스 무선 헤드셋을 끼고 짙은 색 셔츠의 단추를 2개나 풀어헤친 박 씨는 예사 ‘섬사람’이 아니었다.

“원래는 기업형 솔루션 회사나 정보기술(IT)업계에서 15년 정도 근무했었죠. 이곳에서 커피 전문점을 개업한 지는 이제 2년 3개월 남짓밖에 안 됐어요.”

말 그대로 박 씨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억대 연봉을 받으며 기업형 데이터베이스(DB) 솔루션 업체의 임원으로 근무하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제주 섬 한 구석에서 바리스타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전직 IT 전문가였다. 그런데 IT 기업 출신이면 기계와 친할 법도 한데, 이 가게에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르며 수압으로 커피를 내리는 에스프레소 머신이 한 대도 없었다. 박 씨의 손끝에서 조절되는 물줄기가 커피 필터를 지나야 비로소 짙고 풍부한 향의 커피가 탄생했다.

―가계 안을 보니 에스프레소 머신이 없는데, 핸드드립만 하시나요.

“3년 전에 서울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내려와서 여러 가지로 마음이 무거운 상태로 제주도 올레길을 걸었는데 ‘여유 속의 쉼’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딱 꽂혔어요. 마음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커피 한잔, 따뜻하고 행복을 나누는 커피 한잔. 이것들이 마음의 기운을 얻어 갈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싶었던 것이죠. 그리고 거기에 걸맞은 방법이 핸드드립이라고 생각했죠.”

―인터넷 일각에는 벌써 유명인이 되셨습니다.

“여기 다녀가신 분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서 이곳을 좋아하는 그룹을 만들었더라고요. 한 4개월 정도 됐는데, 그 그룹 중에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에 내려와서 사진 전시회도 했는데 그 모든 과정들이 온라인 상에서 이뤄지고 소개되더군요.”

―잘 다니시던 직장을 그만두고 제주도에 내려와서 커피를 만들어 판다니, 가족들이 반대하지 않던가요.

“가족들은 95%가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직장생활하면서 내가 행복하고 내가 즐겁고 해야 되는데, 정작 내가 힘들고 내가 지치더군요. 사람들이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 제대로 찾아서 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 같아요. 진짜 심하게 말하면 무덤 속에 들어가기 전에라도 그걸 알면 다행이다 할 수 있죠. 잘할 수 있는 일, 좋아하는 일을 빨리 찾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싶어요. 짜여진 도시의 틀 안에서 살다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죠. 그래서 그렇게 더 이상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실행해야겠다고 다짐했죠.”

―굳이 제주도를 선택하신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커피를 배우는 과정에서 맛있다고 하는 커피 집은 다 다녀봤어요. 일본에 커피 투어도 가보고요. 그러면서 정말 여유 있는 커피 한잔은 제주도가 딱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커피 로망스들의 풍경은 바다와 커피와 여유이거든요. 이 가게에 자리가 많지 않지만, 어느 곳에서도 바다를 향한 시야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설계를 했습니다.”

―원래부터 커피 애호가셨습니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자판기 커피가 도입됐었는데, 당시 남산 도서관에만 자판기 커피가 있었어요. 그때는 커피 맛도 잘 모르면서도 멋으로 자판기 커피를 마시곤 했죠. 공부도 공부였지만, 커피를 마시는 것도 도서관에 가는 하나의 재미였습니다. 대학시절에는 다도(茶道)를 배워서 차 마시느라 커피를 끊기도 했었죠. 그 후 회사생활 하면서 한 9년 전인가? 로스팅 커피집에 기업의 고객하고 같이 간 적이 있는데,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정신이 아찔했어요. 커피 향이 너무 좋아서 ‘이런 세상이 있구나’ 싶더라고요. 그때부터 집에 와서 한 구석에 박혀 있던 핸드밀(커피원두 분쇄기)을 꺼내서 매일 커피를 마셨습니다.”

―원래는 IT 업체에 근무하셨다고 들었는데 유망 직종에서 임원까지 하신 분이 바리스타로 전향한 계기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다른 회사에 재취직을 할 것이냐, 지인들과 함께 새로운 비즈니스를 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었죠. 그 과정에서 지리산, 설악산 종주도 하고 올레길 종주도 해보면서 새로운 길을 갈까 고민을 했죠. 만약 같은 길을 계속 가면 짧게는 5년 뒤 혹은 10년 뒤에 똑같은 고민을 또 해야 하거든요. IT 분야는 워낙 빠르게 변하고 아래 세대도 ‘치고 올라오고’ 하니까. IT 업계가 워낙 급변하기 때문에 노쇠현상이 다른 분야에 비해 빨라요. 그래서 앞으로 계속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낫겠다고 판단을 한 거죠. 주변 지인들은 95%가 ‘먹던 밥 먹어라’고 반대를 많이 했는데 지금은 90%가 부러워하고 나머지 10%만 ‘그래도 도시에 살아야지’라고 안타까워하고 있죠.”

―실례지만, 전 직장과의 수입은 어느 정도 차이 납니까.

“전에 다니던 직장과는 비교가 안 되죠. (웃음) 그래도 올해 들어서부터는 전 직장 다닐 때 수입의 60% 정도까지는 되는 듯해요. 직장 다닐 때는 연봉 1억 원은 찍었거든요. (웃음) 그런데 연봉 1억 원 받아봐야 세금도 내고, 많이 번 만큼 쓸 데도 많고 주변 기대 수치도 높고 품위유지도 해야 되고 하니까 결코 만만치 않고, 많이 번다고 버는 게 아니에요.”

―바리스타가 되기 위해 전문적인 교육을 받으신 건가요.

“직장을 관두고 서울의 ‘전광수 커피 아카데미’에서 6개월 동안 바리스타 교육을 받았어요. 거기서 원두 로스팅이나 핸드드립 같은 수업을 들었죠. 그런데 입맛이 있어야, 맛있는 걸 먹어봐야 재현하기가 좋다고 하듯이, 맛있는 커피를 마시러 다니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공부였죠.”

―커피를 배우면서 힘들었던 점은 없으신지요.

“커피의 경우 기본적인 원리는 있겠지만 정형화된 방법론을 세우기 힘들다는 겁니다. 각각의 커피점이 처한 현실이나, 사용하는 머신도 다 다릅니다. 자신이 공부했던 머신과 새로운 머신을 접했을 때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건 고스란히 저의 몫이죠. 예를 들면 제주도는 습기가 많아서 생두를 보관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처음 가게를 열고 세 가마니나 되는 비싼 커피 원두를 버린 적도 있어요. 장마철에 생두가 습기를 다 빨아들여서 허옇게 변해버린 거죠. 가슴이 아프고 속이 쓰렸어요. 결국 그 원두들은 가게 인테리어용으로 쓰거나 로스팅 연습용으로 썼습니다.”

―전 직장을 계속 다닐 걸 하고 후회한 적도 있으신지.

“전혀 없어요. 여기서 점점 더 행복의 기운들을 나눠가는 것 같아요. 회사에 있었으면 개발자들을 닥달해서 상품을 만들어야 되고, 밤새워 일하고 지치면 보약을 억지로 먹어야 됩니다. 월급쟁이가 1억 원 벌면 적지 않게 버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것보다 지금이 더 좋아요. 커피 외에 다른 것에 매료되지 않는다면 커피를 계속하고 싶어요.”

―인생 이모작에서 가장 고민해야 할 점은 뭐라고 보시나요.

“관성화된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어요. 머리도 비우고 마음도 비우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면을 비워야 길이 보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뭔지 생각할 수 있게 되죠.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잘할 수 있는지, 좋아하면서 잘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최상이죠. ‘절대 서두르지 말 것, 때가 되면’이라는 영화 속의 한 문구가 있어요.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이라고 봅니다. 조급하게 되면 서두르게 되고 서두르면 일을 망치거든요.”

―사족인데, ‘최남단커피볶는집’이라는 건 다른 커피집 위도를 따져보고 붙인 겁니까.

“음… 마라도에는 (커피전문점이) 없으니까요.”

제주 = 박준희 기자 vinkey@munhwa.com